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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의 환기 : 달을 닮은 항아리

이예진

생각의 환기 : 달을 닮은 항아리

 지친 일상을 마무리하고 집에 가는 어둑한 밤, 환한 달이 비추어질 때면 나도 모르게 시선은 위로 향한다. 핸드폰을 꺼내 들어 환한 달을 찍기 위해 밝기를 줄이다 카메라 화질을 탓하며 포기하기도 한다. 칠흑같이 어두운 배경 속 홀로 서 있는 달을 바늘에 실 꿰듯 바라보면, 달은 단순한 곡선으로 둥글게 맺어졌지만 조금은 구깃구깃하다. 또한 몽고반점 마냥 얼룩진 모습이지만, 이가 지닌 빛은 거대하고 묵직하다. 


백자 달항아리, 조선 18세기, 보물 1437호,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이러한 달과 닮은 항아리가 있다. 조선 17세기 후반부터 100년가량 짧게 생산되어 더욱 희귀한 ‘달항아리’이다. 달항아리라는 이름과 걸맞게 동그랗고, 무늬 없이 지극히 평범하다. 푸른 끼 없이 뽀얀 우윳빛의 색상 이면에 약간의 빙렬과 누르스름한 빗금은 그간 겪었던 세월을 나타내는 듯 보인다. 
  국내외를 통틀어 약 20점 남아있는 달항아리는 도자사 연구에 큰 비중을 갖지 못했다. 하지만 자신이 항아리 귀신이 될 것 같다는 한 인물을 통해 우리는 달항아리에 가까이 다가갈 수 있을 것이다. 바로 근대화단의 대표 작가 수화(樹話) 김환기(金煥基) 이다. 

 (김용준의 <골동설 (1948)> 은 말한다. “대체 수화 (김환기) 라는 사람은 어찌 된 인간인지 연래로 내리 오륙년을 두고 번질나게 항아리만 사들이는데 그것도 처음에는 조선조 항아리가 천하일품이라고 그저 길쭉한 놈, 둥그런 놈, 허여멀건 놈, 아무튼 닥치는 대로 값도 묻지 않고 마구 사들이더니 ..”)

  1930년대에 동경에서 유학을 마친 김환기 (1913-1974) 는 귀국 후 대상을 단순화시켜 요약하는 당시 서구 추상미술에서 한국의 전통미술과 자연을 찾기 시작했다. 그는 조선 예술에 심취한 상고주의자들 (이태준, 김용준)과 교류하거나, 조선백자에 대한 논의를 펼친 야나기 무네요시의 영향으로 가장 한국적인 것을 찾아내기 시작한다. 가장 한국적인 것 중에서도 그는 백자를 수집하였고 이를 자신의 예술로 정착시켜나갔다. 김환기의 백자에 대한 열정은 1944년부터 한국전쟁이 일어나기 전까지 거의 매일 한 점의 도자기를 구입해 들일 정도로, 항아리에 미쳐있었다.


백자와 꽃, 1949, 캔버스에 유채, 41×60cm, 환기미술관 소장

 김환기는 한국적인 소재를 조형하여 반추상적인 자신의 세계를 구현시켰다. 한국의 서정을 담아낸 달항아리와 꽃이라는 소재로 현대적인 구성을 보인 작품으로, 백자와 꽃은 산등성을 견주며 조화를 이룬다. 백자는 구연부가 잘려있으며, 그림자에 의한 표현도 단순하게 평면적으로 나타났다. 김환기는 아래의 굽이 위의 구연부보다 좁은 백자가 하늘에 둥실 떠 있는 것 같다고 표현하였다. 마치 커다란 하얀 달이 꽃과 닿을 만큼 내려와 빛을 비추는 모습을 연상시키며, 우리는 밤 기운의 고즈넉함을 느낄 수 있다. 

 본래 달항아리는 큰 크기로 인해 백자대호(白磁大壺) 혹은 둥근 원 모양이라고 하여 백자원호(白磁圓壺) 라고 불렸지만, 달과 둥그런 항아리가 함께 표현된 김환기의 작품으로 인해 ‘달항아리’ 라는 용어가 보편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달이라는 단어가 더해져 만들어진 의미는 굉장하다. 그저 달과 닮은 모양새 정도로 생각해 볼 수 있지만, 달이 주는 풍요로움과 안정감은 무시할 수 없는 또 다른 추상이다. 우리는 넉넉한 달을 보며 소원을 빌기도 하고, 누군가를 떠올리며 추억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김환기가 왜 백자에 심취했고, 그중에서도 달항아리를 그린 이유를 달이 가진 의미를 생각해보는 이 지점에서 찾아내면 어떠할까. 


김환기, 백자와 달, 캔버스에 유채, 1958, 케이옥션

 달항아리를 소재로 한 김환기의 또 다른 작품 중 <백자와 달> 역시도 푸른색 배경에 달과 항아리의 구성이 단순하게 돋보이는 작품이다. 그가 그린 달항아리의 모습은 온전한 곡선으로 둥글지만 비스듬히 찌그러져 있기도 하며, 속은 비어있지만 무언가 가득 차 있는 듯 보이기도 한다. 
 그가 이러한 달항아리를 제일 많이 그리던 시절은 1960년대 초반 파리에 있을 적이다. 일본으로 유학을 다녀왔던 그는 서울로 귀국했지만 1956년, 한국적 정취를 지녔던 그의 작품을 보다 넓은 세계에 도전하기 위해 다시 파리로 향했다. 그는 타국에서 생활하며 늘 고향 안좌도를 그리워했고, 고향의 바다와 산천을 담아내어 일명 ‘환기블루’라고도 불리는 푸른색을 주로 사용하였다. 

 우리는 주로 한국의 미를 자연에서 파생된 단순함과 간결함이라 말한다. 이러한 소박함 안에는 진실된 힘이 응축되어있다. 조선의 백자는 새하얀 단순미가 돋보이지만, 생기의 기운이 물씬 풍긴다. 김환기에게 한국적인 것은 가장 세계적인 것과 동시에 다른 어느 것과도 견줄 수 없는 조선만의 넉넉함이었다. 
 곤궁했던 파리에서의 생활과 타국에서 고향에 대한 그리움으로 텅 비워진 그의 마음은 희망에 부푼 백자 달 항아리를 통해 채울 수 있었고, 내면에 요동치는 무거운 생각을 환기할 수 있었을 것이다.


백자 달항아리 (보물 제1437호) 독립 전시 공간, 국립중앙박물관

 큰 몸을 자랑하는 백자 달항아리는 접합기법으로 인한 비스듬한 모습마저 자연스러운 편안함을 보이며, 인위적인 표가 없다. 소박한 아름다움을 뽐내는 달항아리를 바라보면, 마치 멈춰있는 시간 속에 부드러운 안정감에 휩싸여 온전히 나에게 집중하게 된다. 
 국립중앙박물관 별도의 공간에는 달항아리와 이를 비추는 은은한 조명과 잔잔한 미디어 영상이 서로 조화롭게 이루어져 현대인들을 위한 휴식과 감상의 힐링공간으로 주목받고 있다. 

 바쁘다 바빠 현대사회를 외치는 우리는 여러 기기의 화면에 머무르며 일상을 보내곤 한다. 창문 밖 풍경, 떨어지는 빗방울 혹은 어둠 속 달을 바라보는 우리의 감성은 무뎌진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사진으로 잠시 담아볼 화면이 아닌, 우리의 눈으로 그리고 마음으로 두텁게 쌓여진 생각을 조금씩 비워 낼 시간을 가져보는 어떠할까. 현재 코로나 시대 필수 예방수칙인 환기, 이제는 우리의 생각에도 환기가 필요한 때이다. 

이예진 kawnso@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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